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화권-러시아-만주 관계 (문단 편집) === 전근대 === 러시아어로는 중국을 키타이(Китай)라고 부른다. 키타이라는 언어는 원래 만주 일대의 [[거란족]]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중세 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당하고 일부 거란족들이 중앙아시아로 피난하여 [[카라 키타이]]라는 나라를 세웠는데, 이들은 이웃한 다른 튀르크어권 국가들에게 마치 자신들이 중국 전체의 지배자라도 되는 냥 과장하기를 좋아했다.[* 카라 키타이 지배자들은 자신들을 구르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주의 지배자라는 뜻이었다.] 유라시아의 유목민들은 중국을 카타이 혹은 키타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고, 중국 관련 정보를 중앙유라시아 유목민으로부터 접한 러시아 역시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유럽]]에서는 [[타타르의 멍에]]로부터 벗어나 [[동슬라브]]계가 통합되어 세워진 [[루스 차르국]]의 동진으로,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 서부를 시작으로 시베리아 동부가 차례로 점령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여러 퉁구스 제족들 및 [[튀르크]]계의 [[야쿠트족]], 몽골계의 [[부리야트|부랴트족]] 등 시베리아의 여러 민족들이 정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사크]] 탐사대는 청나라 국경까지 탐사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탐사대는 보급을 받기 힘든 조건과 잉여 식량이 부족했던 시베리아 자연 환경의 영향으로 탐사 지역 원주민들의 식량을 무상으로 약탈하곤 했는데, 청나라 국경으로 남하하던 코사크들이 청나라와 우호적인 부족들까지 약탈과 방화하는 일이 많아 분쟁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강희제]]는 코사크들을 대군을 동원해 토벌한 후 러시아와 국경과 관련된 조약을 맺는데, 이것이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이후 러시아와의 분쟁은 끝나고, 교류를 했으며, 러시아로부터 서구 문물들을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이는 [[옹정제]], [[건륭제]] 때에도 이어졌다. [[파일:external/cfs11.blog.daum.net/48e8a1d9a5941&filename=7.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